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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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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대둔산 소개

호남의 금강, 또는 남한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대둔산은 정상을 경계선으로 전북 완주군과 충남 금산군 및 논산시와 접경을 이루는 38.1㎢의 도립공원으로서, 해발 878m의 마천대를 중심으로 뻗어내린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져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금강통문을 가로질러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잇는 금강구름다리는 길이 50m, 폭 1m로서 삼선계단(길이 36m, 경사 51도, 127계단)과 함께 대둔산의 유명한 명물로서 등산객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봉우리마다 한 폭의 산수와라고 할 만큼 그 장관을 뽐내는 대둔산에는 신라 문무왕때 국사 원효대사가 차마 이 바위를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삼일을 이 바위에서 지냈다는 동심바위를 비롯하여 금강통문, 장국바위, 용문굴, 장군봉, 칠성봉 등에 고유하고 유서 깊은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구슬같이 맑은 물이 사철 흐르고 있다고 하여 지어진 옥계동 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또한 서기 638년 선덕여왕 7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 되었고, 그 후 875년 신라 헌강왕 1년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된 안심사가 있으며, 1592년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왜군이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침입해 왔을때 광주목사(도절제사) 권율장군이 이치의 험난한 지세를 이용하여 1,500여명의 병력으로 왜군 2만여명을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던 이치대첩(배티재)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1894년 공주 우금치 전투 패전이후 일본과 관군에 밀려 남하하던 농민군의 일부가 대둔산 형제봉 아래 암벽위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 3개월 동안 맞서 최후까지 항전하기도 했던 동학농민 최후 항전 유적지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는 곳입니다.

매년 10월 말에는 대둔산 축제를 개최함으로서 완주 8품 8미 전시행사, 대둔산 등산대회, 군민노래자랑, 완주 8경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인근 주변 명소로는 고산면 오산리에 위치한 자연휴양림을 비롯하여 대아 수목원, 동상 운장산계곡, 소양 송광사, 대아 저수지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라 할 수 있습니다.
대둔산사진

대둔산 유래

500여년전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둔산고산현북 45리(大芚山高山縣北45里)'라 쓰여있고, 1658년에 썼다는 <안심사적비>에는 바위에 가로로 크게 '대둔산 안심사비(大芚山 安心寺碑)'라고 적혀있습니다.
그 아래 비문 첫줄에는 '조선국 전라도 고산현 대둔산 안심사 사적비명(朝鮮國 全羅道 大芚山 安心寺 事蹟碑銘)'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모두 싹나올 둔(芚)자를 써서 대둔산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대둔산의 바른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인 '한듬산'입니다. 이 한듬산을 한자화한 것이 대둔산이어서 '듬'의 뜻이 들어있지 않고 다만 '듬'과 비슷한 한자를 음자화한 것이 '둔'이므로 그 둔자가 한자로 어느자이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벌곡, 가야곡 등 일부 논산사람들은 그 쪽에서 보는 한듬산의 모습이 계룡산과 비슷하지만 산태극ㆍ수태극의 대명자리를 계룡산에게 빼앗겨 한이 되어 '한이 든 산'의 뜻으로 한듬산이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한듬산의 한을 크다는 대(大)로 하고, 듬은 그 소리만을 비슷하게 둔(芚), 혹은 둔(屯)으로 해서 대둔산(大芚山)이 된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 산자락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지금도 대둔산이라 하지 않고 한듬산이라 부릅니다.

배티재는 임진왜란 당시 골짜기에 배나무(산들배나무)가 많은 재(고개)라 하여 이름하였는데, 그후 한자화하여 이치(梨峙)로 쓰고 있습니다. 진산면쪽의 골짜기에는 높이 14m의 큰 산들배나무가 있어 금산군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